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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몇 주 전에 일본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가 엎치고 덮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국가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비통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실종하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일평생 쌓아 놓았던 기반이 일시에 지진과 쓰나미로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TV의 화면을 보면서도 커다란 두려움에 빠졌었습니다. 우리 앞에 평균 건물 3층 높이의 파도가 덮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대규모의 파도가 육지를 쓸어가는 것을 헬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굉장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일본 사람들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번 재해로 인해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앙의 혼돈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신가? 좋으신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인가? 일본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우리와 상관없는 멀고 먼 지역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신앙의 혼돈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 자신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고통이나 환난을 경험하게 된다면 신앙의 혼돈 폭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분의 자녀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해서 함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 그 자녀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는 실의에 쌓이게 되어 신앙의 혼돈에까지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신앙생활까지도 멀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데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 왜 이런 환난과 고통이 있어야만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며 신앙의 혼란 속에 헤매게 됩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어려움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누구에게나 닥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난과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일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벌어진다 할지라도 꿈쩍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요동하지 않고, 힘 있게 앞으로 달려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먼저 왜 이런 재난과 환난과 아픔과 고통이 우리 인간들 사이에 있게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쓰나미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왜 환난을 당하는가? 왜 병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가? 라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여 주셨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으므로 구원을 받았음을 압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자들로 드러나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모든 피조물이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대하는 이유가 20절에 적혀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모든 창조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허무한데 모든 피조물이 굴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번성하라. 다스리라.”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로버트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 나누기 위하여 인간에게 인격을 주시며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신 인격을 사람들이 잘 못 사용하게 됩니다. 사탄이 나타나서 “봐라. 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나처럼 되어서 선악을 분별한다. 내가 왕이 되려고 한 것처럼, 너도 선악과를 따 먹고 한 번 반란을 일으켜 봐.” 라고 유혹하게 되는데,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니까,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고 남은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는 이기심과 탐욕과 거짓과 분노의 왕으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소유하게 되면서 우리는 어둠의 존재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타락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타락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반란하고 범죄 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를 창세기 3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잉태하는 고통, 육신 적으로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되므로 인해 생겨난 결과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타락하여 욕심과 불평과 미움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수고하고 애써야지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라며 땅과 다른 모든 피조물이 망가질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얘기합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해 세상이 이렇게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미움과 거짓과 불평과 탐욕,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되었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망가지게 되었는데, 땅이 저주를 받아 기근이 있고, 지진과 쓰나미, 더위와 추위, 태풍과 장마 등 자연의 현상까지도 모두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서 문제를 안 가지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해 버렸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시 회복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고, 그래서 그분의 나라를 세울 때, 우리도 회복되고, 주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도 다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무저갱에 빠지게 되어 그 권세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까지는 이러한 문제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살려고 하니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속고 속이면서 고통을 느끼고 원인 모를 수 많은 병들에 시달리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고통을 피하면서 사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기근이 있고, 지진이 있고 쓰나미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이 모든 것을 안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귀가 우글거리며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기에 문제는 늘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는 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너희들에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고통이 없을 것이다. 환난이 없을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것이 주어졌을 때 너희들은 승리할 수 있다.” 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지만 너희는 이길 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승리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소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약에 보는 것이 소망이면 그것은 소망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되는 것인데, 이 소망을 믿음으로 붙잡으라고 얘기합니다. 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면 타락했던 내가 우리 예수님처럼 된다고 요한 1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질투나 원망이나 미움이나 거짓이나 탐욕이나 이기적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는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주님이 가지고 계신 주님의 성품, 주님의 마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마음, 그런 것이 없고 사단적인 요소들, 미움, 거짓, 탐욕, 그런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 때 우리가 주님처럼 된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병들고 쇠약해져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통치하실 때 아픔과 죽음이 없는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우리 주님께서 다시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을 망가뜨리기 이전의 세상으로 주님께서 다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도 무저갱에 빠뜨려서 다시 사탄의 권세가 드러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다음에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한다고 해도 또 문제가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평생 사는 동안 그것의 연속이고 반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오시고 주님이 통치하는 그 나라가 오게 되면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데, 그 나라는 우리가 소망해볼 만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어려움과 고통이 와도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견뎌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리더 한 분 잘 만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가정에서도 좋은 아빠가 있으면 그 가정은 행복에 넘칩니다. 그렇지 않고 술 마시고 폭행하고 그런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모든 식구가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리더 한 명 잘 만나는 것으로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모릅니다. 좋은 목사님 만나고, 좋은 대통령 만나고, 좋은 왕 만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금 나은 사람이 리더가 됨으로써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데,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되 인간까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분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얼마나 좋겠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고 소망할 수 있어야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으며 우리의 신앙의 길을 꿋꿋하고 힘 있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고통스러우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주님이 이 땅을 통치하실 그 날을 항상 바라보는 그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것을 확신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너 혼자 감당하는 것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 세상이 있는 동안에는 이런 환난과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너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주께서 말씀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견디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모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적혀 있듯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데 탄식하시며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 그분이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위로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끼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 제 아내가 저에게 자기의 힘든 것을 종종 얘기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얘기를 듣는 즉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내가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잘 어주기 만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아내 편에 서서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저는 또박또박 해결책을 제시해 주니까 진정의 위로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들어주는 분이 계시고, 나와 함께 울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을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탄식하고 우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너무나 슬퍼서 고통에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베다니에 오셨을 때 마리아가 나와서 “엎드려져서” 울게 됩니다. 막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며 막 몸부림치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그랬던 것이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게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가운데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이 맞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체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 힘들어요. 마음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하며 울부짖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혼돈에 빠지는 것은 현재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이 그것을 뒤집어 바꾸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바꾸셔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아무리 힘든 고통과 환난이 닥쳐와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이 믿음이 정말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다른 사람들을 보니까 그렇지 않던데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못되고 비참하게 끝나 버리는 것을 제가 보았는데요.” 라고 반문하기도 하고, "저도 그와 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맥락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지, “He works all things for the good." 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뜻은 나의 야망과 나의 욕심을 채우는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편해진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구절에 어떤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의해도 행동에 옮기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면 주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환난이나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용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일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물어볼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처럼 된다면서요. 왜 그때까지 기다리시지 지금부터 우리를 고통에 몰아넣고 계십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때까지 기다리실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분이 아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으로 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막 장난을 치며 걸어오다가 그만 시궁창에 빠져서 오물을 뒤집어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를 끄집어내어서 “집에 가서 씻자.” 라고 그대로 놓아둘 부모님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즉시로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주고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왜냐하면, 아빠는 자식이 더러운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가 모두 주님같이 거룩해 지고 깨끗해질 것이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되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이 세 가지를 분명히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환난과 고통이 와도 이것을 이겨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함으로써 망가진 모든 세상과 피조물은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날까지 어떤 환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방법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첫 번 째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두 번 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세 번 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꼭 붙잡고 나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요동치 아니할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승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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