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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국 안에, 그것도 세속 문화의 중심지인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 본부를 두고 있는 컴미션의 내일의 꿈은 2세들을 일으켜 복음이 필요한 개척지를 향하여 떠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소돔 성안에서 의인을 찾겠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선이 허물어진 할리우드의 윤리관, 물질 만능 주의, 세속주의, 개인주의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 땅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까 고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은 이 땅속에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고 믿는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다 망하고 깨지고 부서진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며 그분을 간절히 소망하는 선한 그루터기들을 일으키시어 자신의 약속을 꼭 이루셨다. 세상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역류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존속시키셨다. 이런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배척받고, 조롱받고 심지어는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진리를 바로 아는 사람들은 어떤 권위에도 타협할 수는 없다. 그 땅의 문화를 받아드리기보다는 불편하고, 더럽고, 낯선 땅 가운데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기를 원했다. 이런 별난 2세들이 이 로스앤젤레스 땅 가운데 구석구석 존재할 것을 믿으며 이들을 찾아내어 거룩한 영적 대 혁명에 함께 힘을 쓰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내 시대에는 빨래를 손으로 하고, 편지를 손으로 썼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장거리를 걸어가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교회를 가야 즐거운 일이 있었다. 교회 행사의 유인물들을 만들기 위해 정성스럽게 철필로 긁어 등사해서 인쇄물을 만드는 것이 기쁨이었다. 만원 버스에 시달려 학교를 등교하고 냄새나는 화장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짜장면을 한번 먹기 위해 졸업식 날을 기다렸다. 지금 시대에 비한다면 원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름대로 낭만적이었다. 이러한 아날로그 시대가 아주 빠른 속도로 디지털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 발달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장담은 못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놀라운 발견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사람들의 생활습관과 정신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전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슬쩍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세계가 좁아지고 있고 어제는 적이었던 나라가 이제는 이웃이 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이 시간을 뒤로 돌려 버린 듯한 답답한 땅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현시대의 사람들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교육을 받았다. 개인의 상상력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엇보다 존중받으며 살아왔다. 불편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안락하고 편리하고 따뜻한 곳을 과감하게 등질 수 있을까?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 미국 땅에 와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 조상들이 흘린 땀방울의 대가로 풍요와 부와 편리를 자랑하는 최강의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은 미국인들에게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창조력을 계발하도록 자유를 허락했고 그로 인해 온 세상을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선교 국가로서의 미국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땅끝의 백성들과 나누었다. 그런데 이 부유함이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교회 중심의 공동체 삶이 개인 중심의 사회로 바뀌어 갔다. 디지털 문화가 개인주의의 아성을 견고하게 쌓게 하면서 모든 관심이 자기중심으로 머물게 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이 줄어든다. 교회에 세속문화가 파고든다. 어려운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가르치면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릴까 봐 조심스럽다. 이런 교회 환경 속에서 얼마나 강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할 수 있을까?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 아무도 그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없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과연 우리 본부가 할 일은 무엇일까? 디지털 문화와 삶 속에 익숙해 있는 선교사를 아날로그 문화로 역류시켜 보내는 것이 가능할 까가 우리에게 주어진 큰 부담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적 정신이 빛바랜 고전의 이야기로 남아버리고 말 것인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고집하는 것은 초고속시대와 동떨어진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나는 한국인의 피를 받은 2세들을 향한 기대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세대 차를 말하곤 하지만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똑같이 태어났다. 테크닉은 발달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가치관이 달라질 수는 없다. 

 

2세들은 한국 사람이지만 1세들의 정신세계와는 많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고 그들이 미국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도 김치를 좋아하고 국을 마시면서 '시원하다'라는 말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한국 사람이다. 나는 2세들 속에 잠재해 있는 한국인의 끈질김과 창조력을 읽는다. 그리고 1세들이 물려준 성실함과 근면함을 그들 안에서도 보고 있다. 나는 본부 공동체를 이끌고 가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내가 바라고 꿈꾸는 것은 성경적 정서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삶은 어쩌면 한국인의 공동체적 정서에 매우 부합되는 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며 공동체 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 받기 어렵다. 

 

지난 1월 5~7일간 컴미션 본부에서 요나선교학교를 진행했다. 14명의 소수가 참석했지만 이곳에 2세가 3명 있었다. 이 중의 한 명이 1월 30일에 베트남에 선교사로 떠나게 된다. 23세밖에 되지 않은 자매이지만 기특하기 한이 없다. 선교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 주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던 선교개념이 바뀌어 '하나님 나라'가 베트남에 속히 이루도록 그 땅을 찾아가야 한다는 그 목적이 세워졌다. 작년에 우리는 SMS를 마친 후 김경희 자매를 몽골로 파송하게 되었고 그를 이어 제시카 자매를 베트남으로 보내면서 2세들 속에 일어날 영적 부흥을 꿈꾸어 본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세대의 차를 뛰어넘고 문화의 장벽을 헐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컴을 찾아와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2세들을 보면 다소 비슷한 점이 있다. 나름대로 가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어려운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짧은 인생들이었지만 고난의 시간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고통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우리 말에도 젊어서 고생은 돈으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세상을 향한 도전력도 악해진다.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게 해 주는 통로가 되며 그 고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에 이르게 된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아비. 친척과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 살면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요셉과 다니엘, 모세와 에스더…. 이들의 공통점은 이방 문화를 어렸을 때부터 배웠고 몸에 깊이 베이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땅에서 인정을 받는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방 땅에서 가슴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자존감으로 인해 그들은 이방 땅에서 더욱 인정을 받았다. 그들이 자기의 본국도 살렸고 이방 나라도 살렸다. 그중에 예수님이 가장 큰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늘나라에 있었다. 하늘나라의 최고급 삶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처럼 살다가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했다. 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미국 땅에 사는 2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찾으면 자신들을 미국 땅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 위의 모래 같은 수많은 영적 자녀를 낳는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우리 본부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공부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앞당기는 데 모두 참여하게 하는데 전심을 기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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